감자 속 사막 The Desert In The Potato 2001

생명력, 잠재된 환상을 찾아서


최혜인의 작업은 일종의 '식물 초상화'이다. 식물의 얼굴, 그러니까 그 본성을 그린 그림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칭을 붙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처음 그의 그림을 보았을때 무엇을 그린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기본기를 의심하는 말이 아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림을 미궁에 밀어 넣고 있었다. 그려진 것은 구체적인 사물 같기도 했고 추상적인 형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상도 낯설었고 표현방법도 독특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불분명한 대상은 식물이었다. 간혹 꽃을 그린 것도 있으나 주종을 이루는 것은 감자, 고구마, 양파, 마늘 등이었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익숙한 먹거리가 이렇게 낯설 수 있을까. 당혹감이 스친다. 도대체 이것들이 어떻게 감자이고 고구마이며 앙파이고 마늘인 것일까. 이 소재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밭에서 금방 거두어 들여 흙내가 가는 것도 아니고 정갈하게 손질되어 구매를 부추기는 대형 매장의 상품은 더욱 아니다. 그는 일상의 공간 속에 무심히 방치된 것을 선택했다. 이제 막 부패하기 시작한 것도 있고 부패가 상당 부분 진행된 것들도 눈에 띈다. 감자나 고구마에는 싹이 났고, 마늘은 건조한 상태에서 쪼그라 들었으며 양파도 제 색을 잃은 지 오래이다. 이미 먹을 수 없는 것들이다. 유용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용도 폐기될 것들이다. 상한 식물들은 부분적으로 확대되고 임의적으로 잘려있다. 그래서 생경한 것이었다. 이번에 안도감이다. 처음 그림을 접했을때 느꼈던 모호함이 이 지점에서 발생했나 보다. 오늘날 아름다운 사물을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리는 작가는 드물다. 그만큼 아름다움에 대한 담론은 이미 진부한 무엇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왜 굳이 부패한 식물이어야만 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생명력'. 작가는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식물들을 뚫고 나오는 것들에서 생명력을 보았다. 아이러니다. 감자, 고구마, 양파, 마늘의 피폐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싹과 씨눈, 명백한 죽음의 징후들이다. 그런데 작가는 최후의 검버섯들에서 탄생을 예감하고 있었다. 소멸의 순간에 생성을 생각한다. 대단한 용기이고 여유이다. 작가는 감자싹과 고구마싹에서 사막을 발견했다.

 

공기는 너무 덥고 물은 부족한 곳. 사막은 탄생의 공간으로는 최악이다. 그러나 사막에도 생명체는 존재한다. 잠재된 생명의 환상이 이 곳에서도 계속된다. 그곳의 생명체에게 사막은 더없이 안락한 자궁인 것이다. 감자싹과 고구마싹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패한 감자나 고구마, 양분도 수분도 없는 이곳도 경우에 다라서는 탄생의 최적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작업은 소멸과 생성, 그 접점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어디까지가 소멸이고, 어디부터가 생성인가. 이 물음 자체가 그의 작업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소멸과 생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최혜인이 그린 식물들의 특징은 이물스러움이다. 어느 날 우연히 냉장고 야채 박스를 열었을때의 상황.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법한 일이다. 그 부패한 작은 것들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썩은 상태와 냄새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부패한 표면을 뚫고 나온 싹들이 더 공포스럽다. 부패를 딛고, 생생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들이란. 경악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만큼 징그럽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결코 편안하지만은 않은 경험이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삼투되어 있다. 더군다나 작가는 자세하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세필을 사용한다.

몇 년전부터 그는 세필 작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붓과 먹을 사용하는 한국화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線 )' 이다. 선 한 획만으로도 작가의 역량을 충분히 짚어낼 수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작가 역시 선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 왔다. 좋은 선을 쓰기 위해 서예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작품들은 그 끝에 나온 것이다. 아주 가느다란 필선이 특유의 식물 이미지와 마나면 이물스러움은 배가된다. 그 위로 색이 입혀진다. 얇게 색이 먹은 한지 표면은 미끌거린다. 손으로 잡으면, 아주 불쾌한 흔적만 남기고 미끄러질 것 같다. 게다가 한껏 부풀어 있다. 마치 사람의 장기나 여성의 생식기로 착각할 만 하다. 그림의 소재가 부패한 식물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확신을 얻은 사람도 여기서 잠시 망설이게 된다. 이 역시 작가의 '낯설게 하기' 전략 중 하나이다.

부풀어 오른 식물들에서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그것들은 화면에 떠있는 듯 보인다. 무중력의 공간이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별 다른 배경없는 공간을 접하고 있다. 그는 이 공간에 크기가 다른 식물 이미지들을 늘어놓았다. 작품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은 실물보다 크게 그려진다. 또 대작들도 많다. 식물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때론 욕심스러울 만큼, 갑갑할 만큼, 숨통을 죄고 있는 이 식물 이미지들이 증식해 나를 덮칠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가급적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대상에만 집중하길 원한다. 그래서 택할 것이 초상화처럼 배경을 비워 두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식물 이미지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식물 이미지를 위해 주변 상황마저 기꺼이 포기하고 있다. 이것은 주변 상황을 살필 경황이 없다는 것과도 일맥 상통한다.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순수한 열정을 엿본 것 같아 즐겁다. 계산적이고 빠른 작업들 속에서 최혜인의 몰두가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필자가 그의 작업에서 주목하는 것은 최근작 <감자 속 사막> 이다. 식물의 크기는 줄었고 이미지도 달라졌으며, 색도 빠졌다. 대신 부패한 식물들은 조화로운 공간 속에 떠있다. 이제 그는 생명력 그 자체가 아니라, 이들의 관계로 관심을 확대한 것 같다. 변화의 빌미가 보인다. 작가의 변화된 삶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생명력을 고민하는 그가 얼마 전 엄마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도 매우 생산적인 일이고, 엄마가 된다는 것도 매우 창조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강인한 생명력이 건강한 번식을 계속 해 가듯, 최혜인 작업이 가진 생명력, 그 환상적 잠재력을 기대해본다.

공주형 (학고재 큐레이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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