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집공간 2008
Herd Space
2008.9.17-10.3
공근혜 갤러리_문예진흥기금 시각예술 부분 후원전시
유기적 사유의 장소로서 그림: 군집 공간
이전 어떤 비평가가 자신의 책 제목으로 “식물성 사유”라고 쓴 것을 보았다. 책의 내용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자신이 본 한국화단의 기름기 없는 담백한 예술미를 지칭하거나 혹은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대변하는 듯 느껴진다. 그리고 이 식물성은 ‘동물성’을 상대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자는 공격적이고 화려하고 보다 감각적인 취향을 가진, 그것도 외국으로부터 밀려온 그런 예술사유를 대상으로 삼은 것 같다. 사실 우리의 전통에 익숙한 것이 바로 식물성이 아니었던가? 경제성장의 부산물로서 우리는 즐겨 삼겹살을 먹어대고 있지만, 보리밥에 된장이 항상 떠오르는 우리의 주식이었던 것처럼, 먹이나 화선지는 유화와 같은 외국수입재료에 비하여 청초하기까지 한 식물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미감은 오래부터 줄기차게 이러한 식물성에 가까운 취미와 태도 그리고 그런 사유를 해온 것 같다. 최혜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식물성 사유”는 적절해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감상의 시간이 길어지자, 먼저의 견해가 얼마나 작가를 단편적으로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로 바뀌었다. 우선 작가는 식물성이라는 표면 속에 숨어있는 질긴 생명성과 그 숨을 지키려는 간절한 본성을 본다. 아름답다고 해야 할 작은 이미지들이 이합집산을 통해 구도를 형성한 화면 밑에는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지켜가고 있다. 그래서 식물성 사유가 생각했던 것처럼 순하지 않다는 것을 작가의 그림을 통해 느낄 수 있다.
1.
작가 최혜인이 그리는 모티브 혹은 주제는 식물이다. 그러나 여느 작가들처럼 아름다운 꽃이나 수목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늘 밥상에 올라올 만한 먹거리이며, 흔해서 오히려 기억에서 열외 될 그런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선택되는 보다 의미 있는 식물, 예를 들면 사군자나 잘 알려진 화초들이 아니라, 콩나물과 버섯 혹은 씨앗이 그가 그리는 전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모티브도 그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법. 평범한 것에 대한 혹은 생활의 미시적 성찰을 통해 발견된 모티브는 그 의미를 평가하기 이전에 친밀성을 갖는다. 그 친밀함이 예술이란 통로를 통해 익숙하지 않은 존재성을 드러낼 때, 예술은 자신의 역할을 진정으로 수행한다고 본다. 최혜인은 바로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모티브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친밀성에서 낯선 이질감으로의 단순한 전이로는 만족할 수 없다. 작가는 반전의 역학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친밀성을 서사적 구조 속에서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사유를 짜 나아간다. 그 변화는 그려진 상태에 비추어 본다면, 그다지 파격적이지는 않지만, 그 변화의 성격은 사뭇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화면은 얇은 색의 층과 붓질이 이루어낸 배경 속에서 모티브인 콩나물이나 버섯이 군집된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과슈나 분채를 사용한 듯해 보이는 색칠은 눈을 거스르지 않지만, 존재를 숨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때론 그려진 형상보다는 배경의 색 면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율동이 더 큰 울림을 줄 수도 있겠다. 또한 색채가 보유한 성격도 단순히 동양적인 정서만으로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오방색이나 기름기를 뺀 차분한 먹색은 은은하지만, 그 속에는 젖을 것 같은 차분함 보다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맥놀이를 하는 분주함이 느껴진다. 이런 감응을 얻어내기 위해 작가는 다양한 방법을 실천했었다. 한지 위에 염색을 한다든지, 끓인 식물성 염료가 종이 위에 스며들게 했으며, 때론 아교 칠로서 약간의 얼룩 등의 효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크릴과 같은 인공적인 색채 외에도 백토나 흙의 자연적인 재료를 실험해 본 흔적도 여러 곳에서 찾아진다. 물론 재료에 대한 실험은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선을 자극하고 보다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의도가 아니라, 작품의 의미와 내용에 상응하는 채색과 질감을 찾으려는 조용한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성실성을 읽을 수 있다.
2.
약간 성급한 해석자인 필자는 여기서 작가가 삶을 은유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형상을 이룩하지 않았냐고 결론을 내리고 싶다. 실제로 그의 발언 속에는 자신과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의 사회와 그 알콩 달콩한 삶의 드라마가 묻어난다. 하지만 이미지가 말하는 것들은 그렇게 소급되어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림 자체가 생성의 힘을 가지고 화면 위에 자신의 삶을 유기적으로 펼쳐지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모티브의 선택에서도 그리고 그 연출에 있어서도 삶의 상징성과의 연관은 느슨한 편이다. 식물의 이미지를 통한 상징효과는 - 그러나 지시적 성격이 강하게 도출되지는 않는다 - 언술적인 것보다 오히려 조형적인 차원에서 고려되었고, 이것은 작가가 상상하는 생태계를 직언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작가가 이번에 선보이는 모든 그림은 하나 같이 군집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군락을 이루는 삶의 힘은 그런 집합에서 이루어지며, 이 집합들이 화면의 구도를 형성한다. 과거 작가는 개별적 존재성에 중점을 두었고, 이것은 주체와 타자가 대치되는 양상처럼 보였다. 이제 그림은 작가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은유하며, 보다 중성적이고 비파당적인 의미구조를 형성한다. 중성적이라 함은 작가가 이제 어떤 특정한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한 제3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보는 세상 혹은 그 식물들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가치판단을 보류하고, 거의 일관된 관찰과 사유를 통해 얻어진 현상을 고스란히 설명해 주는 것에 주력한다. 하지만 필자에게 비쳐진 형상은 이렇게 말한다. 개체성이 아니라 군락을 이루는 이 식물들은 그래서 삶 자체가 개별적인 아니라 엮여져 함께 자라고 소멸되는 공동운명체이며, 이것이 드러내는 삶의 힘은 - 비록 미시적인 모습이지만 - 가슴이 아프도록 치열하다고.
3.
작가의 이번 전시는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작업의 ‘중간점검’ 정도일 수 있다. 물론 작업의 향방은 더 진전하겠지만, 그리고 말하지 않더라도 더 좋은 평가를 얻어내고 싶겠지만, 그가 추구한 방향은 그가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관념적일 수 있다. 이 관념성을 순수하게 지켜내는 것 또한 무척이나 어렵고 수고스러운 일이다. 예술의 궤적이란 정말로 불확실성 속에서 진행된다. 그렇기에 과학과는 다른 관심과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 예술은 결과로 평가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시작과 과정에서 가치를 얻어야 한다. 작품이란 예술가의 발상과 노동의 걸러진 결과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문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은 바로 작가가 행하는 작업과 사유의 방식이다. 유기적이라 함은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성을 가지고 꾸준히 진행된다는 뜻이고 여러 조건들 속에서 항상 더 긍정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지, 일시적인 성공과 완성에 안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작가는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아마도 영민한 사람이었다면, 좀 더 스펙터클하거나 드라마틱한 주제를 선택했을 것이며, 간단하게 주위의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무던하게 자신이 고집한 것에 천착하고 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무거운 과제를 옮겨나가고 있다. 나는 이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가 가질만한 가장 절대적이자 가장 최소한의 양심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김정락 (미술사학)